Neuroscience Study
나쁜 기억은 왜 자꾸 생각나는가 본문
기억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특징을 포착하는 방식마저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우리는 종종 서양인을 보면서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마찬가지로 동양인을 자주 접하지 못한 서양인이 동양인을 볼 때도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여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얼굴의 특징을 포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 글래스고 대학 레이첼 잭 교수팀은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상대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더 잘 읽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서양인은 상대의 표정을 읽을 때 눈, 입 등에 나타난 표정 전체를 보는 데 반해 동양인은 눈 중심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잭 교수는 "인간의 얼굴 표정은 동일하다는 환원론자들이 있지만 문화에 따라 얼굴 표정을 읽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번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어떤 방식으로 표정을 읽어내는지는 더 연구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동양인과 서양인이 사물을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기억하는 내용도 다르리라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이다. 이밖에도 개인의 경험이나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사물이나 사건을 읽는 방식도 달라진다. <라쇼몽>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하나지만 바다에 비친 달, 강에 비친 달, 수영장에 비친 달, 물그릇에 비친 달이 다 다르듯이 똑같은 사건이더라도 우리는 다 다르게 기억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는 동물 실험을 통해 학습은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손다이크 박사는 쫄쫄 굶긴 고양이 한 마리를 문제상자(problem box)'에 가두었다. 상자 밖에는 먹음직스런 생선이 놓여 있었는데 특별히 장치해 둔 페달을 밟아야만 문제상자의 문이 열린다.
고양이는 상자 벽을 발로 할퀴어 보고 틈 사이로 냄새를 맡아본다. 초조한 듯 이리저리 서성거리기도 하고 약이 오른 듯 생선을 노려보기도 한다. '야옹' 하고 울기도 하고, 입맛을 다시며 상자 속을 뱅뱅 돌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페달을 밟는다. 문이 열리고 고양이는 생선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고양이를 다시 굶긴 후 상자에 넣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했을까? 물론 고양이는 페달을 밟으면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과 똑같이 서성거리고, 뱅뱅 돌고, 입맛을 다신다. 그러다가 또 우연히 페달을 밟고 생선을 먹는다.
고양이는 두 번의 과정을 통해 낌새를 차린다. 어떤 특정 행동과 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세 번째로 상자에 갇힌 고양이는 전보다 빠른 시간 안에 페달을 밟고 생선을 먹는다. 그렇게 네 번, 다섯 번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페달을 밟는 시간은 점점 단축되고, 어느 순간 고양이는 문제상자에 갇히자마자 페달로 달려간다. 드디어 페달과 문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린다. 손다이크 박사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며 시행착오가 학습의 기본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기억이므로 '기억'의 관점에서 이 실험을 살펴보자. 고양이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패했던 기억'을 하나둘씩 제거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문이 덜컹 열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방금 취했던 행동, 즉 페달 밟기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임을 눈치 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서 이는 뚜렷해진다. 그 행동 외에는 다 불필요하다. 실패했던 기억은 이렇게 제거되고, 성공했던 기억은 더욱 강화된다. 고양이는 기억의 수를 압축하여 끝내 문을 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만일 고양이를 문제 상자와 비슷한 환경에 놓게되면 고양이는 과거의 성공 기억을 떠올리며 페달을 밟으려고 할 것이다. 즉 고양이의 성공 기억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솔루션이 된다.
나는 이런 고양이의 기억을 '완료된 기억'이라고 부르고 싶다. 문제를 멋지게 해결한 고양이는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때 고생은 좀 했지만 내가 원하던 생선을 배불리 먹었고, 그 지긋지긋한 문제 상자의 문을 여는 방법도 배웠지. 만일 비슷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다시 그 방법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될 거야.'
성공 기억은 비슷한 환경에 놓였을 때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솔루션도 되고, 고양이에게 자부심도 안겨준다.
반면 실패의 기억은 어떨까? 고양이가 만일 실패했다면? 문도 못 열고, 생선도 얻어먹지 못한 채 쫓겨난 고양이는 이때의 상처를 두고두고 기억한다. 손다이크 박사의 상자 비슷한 모양만 보게 되면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치려고 한다. 잊으려고 하면 한 번씩 떠올라 심란하게 만든다. 고양이에게 당시의 기억은 쓰라린 상처이다.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일이 뜻대로 안 풀린 날, 어떻게 해도 방법을 찾지 못한 날, 그날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맛있는 줄 모르고, 예능프로를 보면서도 웃지 못한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실패의 기억은 마치 어질러진 방안처럼 계속 우리 눈에 거슬리게 된다. 실패의 기억이 방안에 널브러져 있으면 당신은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눈을 감으면 잠시 도피할 수 있겠지만 눈을 뜨면 다시 마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꾸 떠오르는 기억은 마치 너저분한 방안과 같아 우리에게 해결책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그렇다, 실패의 기억은 성공의 기억과 달리 자꾸만 우리를 찾아오며 우리에게 '야,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잖아! 어서 문제를 해결하란 말이야!' 하고 우리를 달달달 볶는다.
EBS 다큐프라임 <기억력의 비밀>에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비슷한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케케묵은 옛일도 척척 떠올린다. 건망증 환자 입장에서는 그녀의 기억력이 부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속사정은 달랐다. 자잘한 불행의 순간까지 너무 잘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쁜 기억들은 마치 불청객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났다. “너무 많은 기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아요."
그녀는 자꾸 떠오르는 나쁜 기억 때문에 고통에 빠졌지만, 기억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자꾸만 자신을 찾아오는 기억을 떨쳐내려고만 애를 썼을 뿐이다.
나쁜 기억이 왜 자꾸 찾아오는지 조금 더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 나는 가상의 질 프라이스를 가정해 보았다.
질 프라이스 : 그때 저는 구두가 필요했어요. 낡은 신발을 신고 댄스파티에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며칠 동안 엄마 말씀도 잘 듣고 얌전히 지냈어요. 하지만 엄마는 절대 사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셨어요. 도대체 누가 낡은 구두를 신고 댄스파티에 가요? 그날 내내 침대에 누워서 울기만 했어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닌지 서운한 생각이 들어요.
손다이크 박사의 고양이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반면, 질 프라이스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만일 질 프라이스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면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에 빠졌을까? 오히려 성공의 기억은 그녀에게 하나의 솔루션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로 하여금 지갑을 열어 구두를 사게 하려면 며칠 동안 말씀도 잘 듣고 얌전히 굴면 된다는 데이터가 그녀의 뇌에 잘 저장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번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이번에도 얌전하게 말 잘 듣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뇌의 중요한 특성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뇌는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레오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것을 예로 들며 우리 뇌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뒤집는 힘>의 저자 우종민 교수 역시 뇌는 현실과 언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입으로 '짜증나'를 반복하면 그 소리가 귀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실제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도 '왜 짜증이 났는데도 멀쩡한 척하느냐'며 뇌가 화를 낸다고 한다.
뇌가 이처럼 착각하는 특성은 기억에도 적용된다. 뇌는 이미 지나간 일의 기억을 회상할 때 이를 마치 현재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전의 슬픈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전혀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데도 말이다. 뇌는 자신이 저장하고 있는 모든 정보를 늘 현재형으로 받아들인다.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일지 모르지만, 뇌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란 없다. 도리어 '뇌'는 '나'에게 왜 이 기억을 정돈할 생각도 않고 이렇게 어질러 놓았는지 묻는다. 만일 손다이크 박사의 고양이였다면 '목적 달성, 긴급 사태 해제, 정리정돈 완료'였을 기억이 질 프라이스에게는 '아직 목적 미달성, 계속 방법을 찾아볼 것!'이 된다.
이때 질 프라이스의 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첫째는 '새 구두를 살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별로 효용이 없다. 댄스파티가 이미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결책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볼 것'이다. 구두를 못 사서 괴로웠다기보다는 엄마에게 입은 상처가 계속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엄마를 이해 못하는 어린 나를 버리고 엄마를 이해하는 다 큰 '나'로 갈아타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엄마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혹은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지 모르는 법이 아닌가.
김재현. (2011).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서울: 컨텐츠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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